첫눈
"내가 보고 알려줄게!"
"아니야! 같이 보자"
늦은 저녁 최종 발표가 났다는 문자가 왔다. 메일을 열어서 B와 얼굴을 들이밀고 결과를 확인했다. 합격이었다. 나는 안도감이 밀려와 다행이라고 말했고, B는 축하한다고 했다. B는 아주 감격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다. 내가 열심히 했던 게 생각나서 그렇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정신없이 전화를 받았다. 이어서 합격 문자가 날라왔다. 첫눈과 함께 좋은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소중한 사람과 따뜻한 저녁을 보내세요. 문자가 다정해서 평생 기억날 것 같다. B와 쿠폰 13개를 모아서 시킨 피자를 먹고 무한상사를 보며 즐거운 저녁 식사를 했다.
B가 당근으로 무언갈 샀는데 맞춰보라고 했다.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B는 내가 좋아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눈오리냐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오늘 하루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눈오리를 갖고 싶다고 10번은 말했기 때문이다. B는 무려 6개를 샀다고 했다. 이보다 좋은 취업 선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갖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장난감이든, 사치품이든 큰 관심이 없었다. 있어도 티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고, 부모님이 생일날 뭘 갖고 싶은지 물어봐도 딱히 없다는 대답만 해왔었다. 그래서 B도 내 선물을 고르길 힘들어했다. 그런데 눈오리라니. 내가 겨울에 정말 갖고 싶었던 장난감이다. B는 언제부터 기억해 주고 있던 걸까. B에게 고맙단 말을 했다. 내 관심을 알아주고 성과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그 마음이 참 따뜻했다. 온기가 오늘 뿐만 아니라 아주 어린 시절 언젠가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바쁘지 않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당근을 하러 출동했다. 눈이 여전히 오고 있었다. 행복한 우연들이 겹쳐 참 현실감 없는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게 옆자리에 올라 타고 눈 오는 날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B의 손을 잡았다. B의 손은 따뜻하다. 항상 그래서 당연하고 신기하다. 자주 보는 거리도 하얗게 변해서 꼭 여행을 떠난 것만 같았다. 길동을 지나서 둔촌동 언저리에 오니 눈쌓인 나무들이 많았다. B가 활짝 웃으면서 좋아했다. 잠시 외출 나온 것인데도 꼭 데이트 같았다. 캄캄한 골목을 올라가 당근 판매자가 집 앞에 놓아둔 눈오리들을 훔쳐왔다. 나는 아무개 집 담벼락이 있는 눈을 뭉쳐서 오리를 만들었다. B의 손에 오리를 올렸다. 아무 눈뭉치가 아닌 눈오리. 겨울의 특산품을 만들어내는 기분이었다. B는 내가 만든 눈오리 두 마리를 앞유리 틈에 끼워주었다.
다시 손을 잡고 겨울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새하얀 나무를 보며 감탄하는 B를 위해 사진을 찍었다. 꼭 그 나무 아래를 지날 때 눈이 많이 내렸다. 다시 길동으로 돌아왔을 때 눈은 점점 잦아들었다. B가 내게 집 앞에서 놀지, 돌아가 더 구경할지 물었다. 나는 돌아가자고 했다. B가 차를 돌려 다시 나무가 많은 둔촌동으로 향했다. 마법처럼 점점 눈이 많이 내렸다. 창문을 내렸다. 찬 바람을 맞으며 눈이 내리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았다. 우리는 멋있다고 연신 감탄했다. B는 주위를 돌다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경찰차가 멀리서 우리 쪽으로 가까이 왔다. 순간 긴장했지만 우리를 지나쳐갔다. 눈오리 집게를 들고 있어서 봐준 모양이다. 앞유리 틈에는 아직 오리 한 마리가 날아가지 않고 남아있었다. 우리는 헐레벌떡 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신나게 눈오리 군단을 만들고, B는 눈이 오는 풍경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머리에 잔뜩 흰 눈을 이고 우리는 함박눈처럼 웃었다. 마음이 편해서인지, 눈이 너무 많이 와서인지, 그 눈 속에 우리 둘뿐이라서인지 행복한 감정만 텅텅 울렸다. 우리는 눈을 먹기도 하고 나무를 흔들기도 하며 겨울을 만끽했다. B와 함께일 때 행복한 기억이 너무 많았는데, 그만큼 또 행복한 시간이 있을까 생각했던 것이 우습게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B가 활짝 웃고 있었고, 엉망진창 눈을 맞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영화처럼 사랑하는 날이 참 많다. 우리처럼 행복한 사랑을 하는 연인이 있을까. 일단 11월 27일 대한민국에는 없었다고 본다.
눈을 털고 돌아가는 길 맥도날드에 들려 아이스크림을 샀다. 드라이브 스루에 반짝반짝 조명을 달아놔서 B가 좋아했다. B는 눈이나 비를 맞으면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나와 이런 시간을 보내는 건 좋다고 했다. 그치만 맨날 눈 맞는 건 싫다고 했다. B는 내가 눕는 걸 좋아하는 바람에 스키장에서도 벌러덩 누워서 놀았다. 언젠가는 넓은 눈밭에서 B와 데굴데굴 구르고 싶다.
행복이란 감정을 제대로 감각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나에게 행복은 B로 설명된다. 행복한 기억을 다 모아서 펼치면 B가 없는 순간이 없다. 그리고 단조로울 정도로 행복하기만 하다. 다른 불순물이 섞여있지 않다. 우연인 게 수상한 수준으로 주변 환경의 도움도 자주 있다. 영화 드라마도 이렇게 만들면 욕먹어. 아니 애초에 제작하지도 않을 거야. 그때마다 이런 대화를 한다. 그리고 웃는다. 기억에 갇혀있는 게 아깝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녹화해둘 수 있다면 점심 저녁밥 먹을 때마다 볼 텐데. 그러지 못해서 맨날 보고 싶은 모양이다. 같이 있으면 또 만들어 낼 테니까. 자주 봐도, 오래 봐도 매일 보고 싶다.
방대하고 거창한 커리어 계획 중 이제 겨우 한 계단을 올랐다. 이곳에서 3년을 보낼 것이다. 잠시 거쳐가는 곳이 될 테지만 합격 문자를 받고 당신이 첫눈과 함께 활짝 웃는 바람에 평생 잊을 수 없게 됐다.